흙담이 보이는 풍경_함안 고려동유적지에서..

2011. 4. 5. 22:56Canon/5Dmark_t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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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동유적지는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李午)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곳이다. 이오는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 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하였다. 그는 아들에게도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기는 죽은 뒤라도 자신의 신주(神主)를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고려전답, 자미단(紫薇壇), 고려전답 99,000㎡, 자미정(紫薇亭), 율간정(栗澗亭), 복정(鰒亭) 등이 있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보다는 자녀의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학덕과 절의로 이름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이곳을 1983년 8월 2일 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위 치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580번지

문의/안내 :문화관광과 055-580-2301

지정현황 :경상남도기념물 제56호 (1983년 8월 2일 지정)

개요 :고려말 성균관(成均館)의 진사 이오(李午) 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유민으로서 절의(節義)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백일홍이 만발한 이곳을 택하여 담장을 쌓고 거처를 정하였던 곳.

 

 

 

 

 

 

 

 

 

 

 

 

 

 

 

 

 

 

 

 

 

 

 

 

 

 

 

 

 

 

주변을 둘러막기위한 구조물의 형태로
주재료가 흙담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 부터서인가 모든 것들이 콘크리트로 덮여져 있는 세상으로 변하였습니다.
수분이 사라진 회색빛처럼 메말라간 정이 그립습니다.
이미 사라진 흙담,
사라져 버려서 볼 수 없는 흙담,

그리하여 그리움만 더해지는 흙담입니다.

 

역사적 유래를 앎보다 흙담이 주는 고향같은 포근한 풍경에 잠시 젖었던 그곳을 다시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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